미륵사지가 무왕이 피운 꽃이라면 720번 지방 국도 변에 있는 익산 쌍릉은 무왕이 남긴 마지막 유산이다.
쌍릉은 규모가 다른 고분 2기가 약 200m정도 거리를 두고 동쪽과 서쪽에 위치해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불렸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쌍릉이 누구의 무덤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으며, 지난해 익산시는 1917년 약식 발굴 이후 100년 만에 쌍릉 중 하나인 대왕릉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했다.
드디어 쌍릉(대왕릉)이 긴 잠에서 깨어나 1,400년간 간직했던 비밀을 풀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 예상대로, 쌍릉은 왕릉급 무덤이었다!
100년 전 자료를 통해 백제 왕릉이라 짐작만 해오던 쌍릉(대왕릉)이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왕릉은 지금까지 1917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발굴했던 자료를 근거로 백제시대 무덤으로 알려졌으며, 부여 능산리고분군 중 가장 큰 동하총보다 그 규모가 더 커서 ‘왕릉급’으로 추정해왔다.
이번 조사에서 대왕릉의 봉분 직경은 약 25m, 높이 5m 내외로, 중앙에 입구가 있으며 단면육각형의 현실(玄室)로 축조된 전형적인 백제 사비시대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임이 직접 확인됐다. 또, 현재까지 조사된 사비시대 백제의 왕릉급 무덤으로는 처음으로 지반을 다지기위해 흙 등을 여러 겹으로 단단히 다지는 판축(版築) 기법을 사용해 봉분을 조성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 백제의 꿈이 서린 미륵사지가 무왕을 말해준다
익산은 경주, 공주, 부여와 함께 우리나라 4대 고도(古都)로 꼽히며, 유일하게 고대 왕궁이 갖춰야 할 4가지 조건인 왕궁(왕궁리유적), 사찰(미륵사지, 제석사지), 산성(미륵산성, 익산토성 등) 그리고 왕릉(쌍릉)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 중에도 무왕이 만들었다 전해지는 동양 최대의 사찰 미륵사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탑인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이 있다. 2009년 1월 석탑해제 과정에서 사리장엄과 금제사리봉안기, 금제장식 등이 발굴되었으며, 특히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백제 왕후가 미륵사를 창건하고 탑을 세웠다는 기록과 함께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를 통해 미륵사 창건의 배경과 주체, 건립 연대 등이 명확하게 규명되면서 다시 한 번 고도 익산이 품은 백제역사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륵사지 서남쪽에 위치한 국립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서는 미륵사지의 역사뿐 아니라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1만 9천여 점의 다양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또, 금제 사리장엄구와 금제 사리봉안기는 실물 크기로 복제해 전시하고 있으며, 2000년 10월에 출토된 금동향로(보물 제1753호)도 만날 수 있다.
#. 무왕의 수많은 흔적 간직한 익산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를 가던 중 미륵산(용화산) 아래 큰 못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자 왕비가 왕에게 ‘이곳에 큰절을 지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니, 왕의 명을 받은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고, 못을 메워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지금까지 쌍릉의 주인공은 미륵사를 만든 백제 무왕과 그 왕비 선화공주라 여겨왔다. 쌍릉 주변에 있는 오금산, 마룡지, 용샘, 서동생가터 등 무왕과 관련한 설화유적과 익산토성, 금마 도토성, 왕궁리 유적, 제석사지, 미륵사지, 사자사지 등 백제의 유적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도 쌍릉이 무강왕(武康王)과 비(妃)의 무덤이라고 기록돼 있다.
#. 무왕을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을 기다리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발굴로 쌍릉(대왕릉)이 익산 천도를 통해 강한 백제를 꿈꿨던 무왕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측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인골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항온항습실로 옮겨 보관하고 있으며, 추후 학제 간 융합연구를 수행해 최종 분석결과가 나오면 대왕릉이 누구의 무덤인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익산시는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함께 대왕릉의 세부적인 판축양상과 봉분의 공간 활용 등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진행하여, 백제 사비시대 왕릉급 무덤의 조성과정 등을 확인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