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전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호남정치’의 본영
[특별기고]김준엽(전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라고 호남의 전략적 위치를 강조했습니다. 한양을 향해 길게 뻗어있는 끝없는 호남평야는 한민족의 삶을 수호하던 식량의 보고였습니다. 중국과 마주한 바닷길은 선진문물의 통로임과 동시에 한반도 전체를 지켜낸 군사요충지이기도 했습니다. 이뿐입니까? 대동세상을 꿈꾸던 정여립의 고장이며, 인간 해방의 기치를 높게 들었던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 폭력배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후부터 1909년 호
남의병 대토벌이 진행되는 시기까지 호남은 조선 의병 항쟁의 최전선이었습니다. 최익현, 기삼연, 고광순 등 내로라하는 의병장들이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거센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호남은 이 시기를 거치며,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극악한 토벌 작전으로 처절하게 죽어간 의병들의 빛나는 민족애는 이후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의 밑거름이 됩니다.
호남은 산업화의 첨병이기도 했습니다. 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는 대도시로 이주한 호남 농민의 노동력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70년대부터 97년까지 수도권 전입인구의 40%가량이 호남 사람이었을 정도로 호남은 ‘한국의 디아스포라’였습니다. 서울, 경기, 울산, 부산 등에 공장이 생길 때마다 그곳을 채우는 노동자는 적지 않은 수의 호남 출향민들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이 초고속 압축성장을 구가하던 산업화 시대에 호남은 초고속 인구감소를 경험합니다. 현재 호남지역에 거주하는 호남 사람은 500만 명이지만, 출향민은 800만 명입니다.
20세기 호남을 상징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고 싶습니다. 그의 삶은 호남의 현대사를 관통해 있습니다. 성장기 일제의 호남 수탈을 목격했으며, 해방 이후엔 이념 갈등의 한복판에서 좌우합작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격동의 60년대를 거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70년대에 접어들며,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지도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산업화 물결에서 소외된 호남의 설움은 김대중의 고난과 설움으로 이어집니다. 서러움과 차별의 굴레에서 호남과 김대중은 하나가 됐습니다. 민간인 학살의 참극이 벌어진 1980년 5월 광주에선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군중의 함성이 울려 퍼지기도 했습니다.
‘호남정치’를 둘러싼 역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쟁과 혁명, 소외와 설움, 한마디로 ‘한(恨)’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호남의 지난 역사는 찬란한 문화적 성취도 있었지만,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난과 혁명을 마다치 않는 좌절과 눈물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호남이 수백 년간 경험한 고난과 혁명은 현대에 와서 가장 앞선 정치의식과 참여를 가능케 하는 자양분이 됩니다. ‘민주주의와 평화’는 인류 보편 가치입니다. 하지만 호남에게 있어 ‘민주주의와 평화’는 피와 땀입니다. 호남은 두 가지의 보편 가치를 이 땅에 뿌리 내리게 하려고 수많은 호남사람을 역사의 제단 앞에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호남정치’의 본질이고, 본영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호남정치’는 호남의 리더십을 말하는 것이라고, 호남에서 태어나 호남인
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호남정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호남정치’는 호남에서 태어난 호남사람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선 역사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호남은 늘 대의와 정의, 그리고 평등의 가치를 스스로 찾고, 실천해 온 한국 근대화의 첨병이기도 합니다. 정의와 평화, 민주주의와 자유를 실천하고,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정치, 그것이 바로 ‘호남정치’의 요체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선진국 지위에 오르고, 세계 10위권의 무역 강국이 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호남사람의 인내와 성실의 결실이었다고 말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최근 들어 윤석열 정부가 보이는 무능과 무책임을 보면, 민족과 국가가 위기에 닥치면 한발 앞서 전선에 달려가고, 만백성의 식량 생산을 위해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은 호남 사람들의 정성과 부지런함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가 도래한 듯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호남정치’의 부활이 요구되는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