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전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익산쌀’의 정당한 위상
[특별기고]김준엽(전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쌀은 한국,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등장한 세계 3대 곡물 중 하나입니다. 참고로 세계 3대 곡물은 밀과 옥수수, 그리고 쌀입니다. 쌀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지구인 30%가 주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쌀은 오늘날 아시아인이 존재할 수 있게끔 해주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자유무역이 국가 간 민족 간 경계를 무너뜨린 이후 급속한 식생활 변화가 있었음에도 쌀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식량 자원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60년대 이후 압축성장에서 발생한 도시화 및 대규모 이농현상으로 인해 농업이 사라지고, 쌀 또한 그 운명을 다 할 것처럼 여겨졌지만 쌀의 생명력은 현재까지 변함없이 우리 존재를 유지해 주는 근거가 돼 주고 있습니다.
식량이라는 것은 공기와 마찬가지로 인간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야생의 풀도, 바다속 해초도, 어려울 땐 나무뿌리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땅과 바다의 소산은 대부분 식량으로 활용됩니다. 이처럼 중요한 식량이 수렵·농경 사회에선 오로지 자연의 조건에 의존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식량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단순히 인간의 노동과 자연이 결합한 결실을 넘어 ‘상품시장’이 결합한 복잡한 구조로 변화를 겪습니다. 식량으로 이용되는 곡물은 시장에서 결정되는 상품 가치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고, 생산과 공급의 룰에 지배되는 상품으로 변신해 있습니다.
UNEP(유엔환경계획)은 '음식물 쓰레기 지수 보고서'에서 하루에 버려지는 음식의 양이 10억 인분에 달한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반면, 2023년 7월에 발표된 WFP(세계식량계획)와 IFAD(국제농업개발기금) 등 유엔 산하 5개 기구에서 발표한 자료엔 2022년 전 세계에서 7억 명가량이 굶주림을 겪고 있는 것으로 밝혔습니다. 식량의 관점에서 보면, 때때로 재해나 기후 변화로 식량 확보를 어렵게 하는 자연은 인간이 창조한 ‘시장’에 비해 훨씬 너그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식량문제는 ‘시장’의 문제를 넘어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안보’ 영역으로 확장돼 있습니다.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재래식 무기나 핵무기보다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로 등장한 것입니다. 2022년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세계 각국의 걱정이 민간인 피해보다 세계 최대의 밀 생산지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발생할 곡물 가격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식량은 무기화되고 있으며, 식량자급률이 50%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리에겐 국가 존망이 달린 전략적 위협이라는 걸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오늘날 농업은 노동, 자연 또는 과학, 시장이 결합한 구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농촌 노동력을 산업화에 전면적으로 투입해 초고속 성장에 몰입해 온 우리 사회는 아직 농업을 ‘그리운 고향’, ‘전원생활’,‘텃밭가꾸기’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90년대 세계화 물결 속에 벌어진 우루과이라운드 등의 과정에서 정부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항상 정책의 방향은 농민의 노동과 자연의 변화를 경시하고, 오로지 시장원리에서 그 해법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여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농민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기후 변화에 따른 과학 영농의 고도화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농민기본소득’과 농업 관련 ‘R&D 투자’의 대폭 확대 등 정부 정책의 확장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익산시의 논 면적은 1만 7천470ha고, 벼 생산량은 12만t이 넘을 정도로 익산농산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2023년 기준 대한민국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 56.4kg 중 익산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이는 익산시 농민들이 한국인의 생존을 위해 엄청난 역할을 한다는 것의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 반도체, 정보통신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 국가기간산업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기간산업을 존속할 수 있게 해주는 한국인 에너지의 근원은 익산 농민의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21세기는 정보통신 혁명을 통해 인류가 한 단계 도약한 위대한 세기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안주해서 인류 생존의 근간인 농업, 그리고 ‘쌀’의 소중함을 망각한다면 첨단과학기술의 발전도 헛된 꿈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농민이 기여에 합당한 대접을 받고, 동시에 반도체와 자동차에 밀려버린 ‘쌀’의 위상이 제자리를 찾는 그날 대한민국은 21세기 최고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4월 18일,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여당 국회의원들이 거의 불참한 가운데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체 회의를 열고, 윤석열 대통령 거부권 행사 1호 법안인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농산물 가격 안정법 개정안 등 5개 법안을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하는 안을 가결 처리했습니다. 2023년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이 첫 번째로 거부권을 행사한 후 일부 내용을 수정해 재발의한 것입니다. 이번에 처리된 수정안(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쌀값이 폭락하여 농민의 피해가 예상될 때 농협 등이 수요보다 초과 생산된 쌀을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 등이 담겨있습니다. 21대 국회는 얼마 남지 않은 임기 내에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나마 농민 생존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일부나마 담고 있는 농업 관련 법안을 반드시 처리해서 농민의 시름을 조금이나마 덜어줘야 하는 마지막 책임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21대 국회가 유종의 미를 거두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