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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관모와 신발이 들려주는 역사의 비밀

[익산의 재발견 #33]익산 웅포 입점리에 왕족이 살았다?!

등록일 2012년10월30일 18시31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입점리 고분터에서 발굴된 금동 관모와 신발.

“全北益山서 百濟 완형 古墳 발견”(1986. 2. 15. ㄱ신문)

“1,500年 긴잠서 깨 수수께끼 百濟중기 文化를 證言” (1986. 2. 18. ㄱ신문)

1986년 2월, 오랜 세월 말없이 흐르는 익산 금강 줄기 속에 백제의 비밀 하나가 우연히 세상에 밝혀진다.

당시 익산 웅포 입점리 새터 마을에 사는 학생이 칡을 캐다가 금빛 유물을 발견하고 신고를 한다. 이에 문화재청에서 긴급 발굴 조사에 들어가 총 8기의 무덤을 확인하였다.

이 고분에서는 백제 후기 유적에서 볼 수 없었던 토기와 도기(陶器), 장신구, 마구(馬具) 와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제1호 고분은 귀족(왕족, 지배층)의 고분양식인 굴식 돌방형이다. 여기에서 금동관모, 금동신발, 말재갈, 은제말띠, 중국청자 네귀단지 등 지역에서 기존에 확인되지 않았던 귀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관심이 집중되었다.

도대체 이 금동관모와 신발을 언제 누가 쓰고 신었을까? 금동관모와 신발은 최고의 정치적 상징물이자 백제 통치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금동관모는 반원형 금동판을 좌우에서 붙이고 맞붙인 부분에는 복륜(覆輪)을 돌려 머리에 쓴 고깔 모양인데 측판의 일부는 부식, 파손되어 있다.

특히, 금동관모의 뒤편의 휘어진 긴 나팔 모양의 장식은 일본 규슈[九州]의 에타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의 출토유물과 동일한 것으로 당시 백제의 뛰어난 금속공예의 기술이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동신은 2장의 금동측판(金銅側板)을 잔못으로 앞뒤부분을 고정시키고 밑창판을 대어 만들었는데 밑창에는 9개의 스파이크가 박혀있다.

입점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인 금동관모, 금동신발은 정교하면서 부드러운 이음새와 금동 위에 새겨 넣은 무늬들은 백제의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

입점리 1호 고분의 형식과 출토 유물로 미루어 무덤의 주인공은 중앙세력과 연결된 사람으로 왕족에 버금가는 세력을 지닌 토착세력으로 추정된다.

한편, 입점리 고분(사적 제347호)은 금강하구 익산 웅포 입점리 칠목재에서 동남으로 뻗은 해발고도 100m 구릉의 중턱 위치해 있다.

또한 그동안 2차례에 걸쳐 총 21기의 고분을 발굴조사를 통하여 5세기 중엽 다양한 유형의 백제 무덤이 확인되어 당시 백제의 역사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통뉴스 정명열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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