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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국군포로 딸의 귀향

등록일 2007년09월21일 00시00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54년이 지났지만 우리 민족에게 처참한 고통을 안겨준 6.25동란을 잊을 수 없다.
더구나 다양한 피해와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슬픈 일은 가족을 잃은 동포들의 고통이다. 전쟁 중에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의 포화 속에 잃고 한이 되어 눈을 감지 못하며 세상을 떠난 부모가 있는가 하면 전사통지서를 받은 아들이 북한에 살다가 살아 돌아오는 놀라운 기적같은 현실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우리는 남의 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달 한 30대 탈북동포 여인이 익산을 찾아와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윤금옥, 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육군 위생병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6.25동란에 참전 중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죽음의 고비를 무수히 넘나들며 삶의 끈을 이어가던 중 휴전이 되어 귀향의 희망을 안고 포로교환 장소인 판문점까지 왔으나 그의 앞 사람까지 교환이 되고 나머지는 다시 북쪽으로 끌려갔다 한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여정이 계속되었다. 남반부 괴로군 포로라는 명패는 평생 그를 따라 다니며 이방인으로 참혹한 삶을 안겨주었다. 우연히 만난 여인과 가정을 이루었으나 그의 삶의 터전은 광산촌에 속해있는 수용소였으며 그의 평생 주소는 00호 수용소 일수밖에 없었다. 24년 동안 수용소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녀들이 학교에 갈 때면 출입구 감시원이 통학증에 도장을 찍어 주어야 출입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의 삶은 인간지옥이었다.
아침에 부모가 광산 굴 속으로 들어가면 저녁무렵에나 나올 수 있는 혹독한 일터였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 8남매를 낳았는데 자녀들이 성장해서 혼기가 되면 당에서 혼처를 정해주는데 모두 정신이상자나 지체장애인들에게 보내기 때문에 출가한 형제는 한번도 부모를 찾아오는 일이 없어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광산 폭파사고로 처참하게 숨지기 얼마 전부터 막내딸에게 아버지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유언과 같은 말을 해 주었다.
그의 고향 익산의 주소와 부모형제의 이름을 알려주며 네가 어떻게든지 고향에 찾아가 처참한 인간이하의 이곳의 삶을 소상히 알려주고 아버지의 소식을 친족에게 꼭 전해달라고 수차례 당부했다.
폭파사고로 아버지는 배가 터지고 어머니는 하체가 절단되어 사망한 후 고아가 된 윤여인은 탈출의 기회를 엿보던 중 3년 만에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넘어와 유랑과 도피생활을 하며 한국행을 강행, 몽골을 경유 탈출 10년 만에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고모와 4촌 형제를 만나 아버지의 유언을 전하고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눈물 흘리며 북쪽의 삶을 이야기하던 윤여인은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어드렸으니 이제 부모님의 유해를 모셔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옆에 모셔드려야 할 일이 남았다고 말하며 눈가의 눈물을 씻는다.
그러면서 여기는 북한을 너무나 모르는 것 같다고 말끝을 맺는다.
이처럼 아직도 북한에는 국군포로 1세들이 남아있고 그들의 2세들은 인간이하의 환경과 학대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들을 위해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10월 남북정상회담의 의제가 되어 그들이 남한의 고향으로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탈주민지원 익산회장 이용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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