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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가 복원되었다?

[익산의 재발견 #32]1/50 미륵사 복원모형

등록일 2012년10월23일 18시35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아무것도 없네요?”

미륵사지를 방문하는 관람객 대다수가 이렇게 느끼고 말한다.

조금은 당황스럽다. 너무 많아서 보이지 않은 곳이 미륵사지가 아닐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알면 보이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가치 있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미륵사지이다. 그러나 시간에 쫒기는 살아가는 바쁜 현대인에게 조금은 무리라 생각된다.

미륵사지와 지독한 사랑에 빠진 최인경 문화관광해설사는 “미륵사지는 교감할 수 있는 관광지로서 멋진 곳이다”고 말한다.

또한 “텅 비어 있기에 내가 채워짐으로서 그림이 되고 멋진 작품이 되는 곳이 미륵사이다”며 “언젠가 연못지 주변에 수양버들 잔디위에 앉아 있는 남녀 커플을 보았는데 그 자체로 그림이더라. 매번 만날 때마다 다른 그림이 되는 곳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로만 설명하면 전달하기 어렵다. 미륵사 복원모형은 미륵사 전체를 시각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와 가치 있는 유물이다.

미륵사 복원모형은 미륵사를 1/50로 축소한 모형으로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중앙실에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약 17년간 미륵사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발굴성과를 토대로 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600~641)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미륵사터를 발굴 조사하여 출토유물들을 살펴 본 결과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미륵사는 석가모니불이 아닌 미륵불을 모셨던 절로 추정된다. 미륵하생경을 보면 도솔천에 있는 미륵은 56억 7천만년 후에 하생하여 용화보리수 아래에서 세 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한다고 하고 있다.

미륵을 모신 금당과 탑을 이렇게 각각 세 곳에 세운 것은 삼회의 설법을 상징한다. 금마는 미륵이 하생할 인연을 갖고 있는 땅이었고 이러한 용화세상의 세계를 가람으로 구현했다.

3탑 3금당이 나란히 있는 가람의 형태에서 중원의 목탑과 금당의 규모는 좌우 가람의 2배가 된다. 좌우 가람의 석탑은 석탑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다. 현재 서탑은 해체 복원 중에 있고 동탑은 1992년에 문화재관리국과 전라북도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을 나와 연못지 바깥쪽으로 돌아 두 기의 연못 사이로 걸어 중앙 문지로 들어오면 널려있는 석탑의 부재들이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오른쪽 동탑, 왼쪽은 서탑 그리고 그 사이의 높다란 기단부가 있는 곳이 바로 중앙의 목탑이 있었던 자리다. 동탑과 중앙탑 바로 뒤, 8엽의 연화문을 자랑하는 석등하대석이 남아 있다.

미륵사 복원모형의 3탑과 3금당을 넣어 실제 높이와 너비로 규모로 확장해보면 미륵산 아래 미륵사가 얼마나 웅장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높이를 이해하기 쉽게 아파트 층수로 설명하면 목탑(48m)은 15층, 동․서측 석탑은 10층( 27m) 높이이다. 탑 뒤로 금당을 채워 넣으면 공간 감각이 생긴다. 그리고 마치 1400년 전 미륵사 경내에 서 있는 기분마저 든다.

금당지의 높은 주춧돌과 큼직한 기단석들은 미륵사의 규모와 균형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주춧돌이 무려 1m 정도로 높다. 웬만한 사람의 허리 아랫부분이다. 미륵사가 습지에 지어졌기에 습기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고자 한 조상의 슬기가 엿보인다. 화강암의 단단함이 느껴진다.

그 뒤로 자식을 품은 어미처럼 미륵산이 1400년 전 그날처럼 오늘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텅 빈 충만’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미륵사지에서 1400여 년 전 백제인과 충분히 교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소통뉴스 정명열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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