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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리 석조여래좌상, 백제 최대․최초 석불

[익산의 재발견 #17]보물45호 백제시대 기념비적인 걸작

등록일 2012년06월26일 20시53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머리가 몸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원래 미남이었어 내 머리를 찾아줘~”

호국보훈의 달 6월, 원래 머리를 잃어버린 석불이 이렇게 말하고 있고 있는 것 같다.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에는 석불사로 불리고 있는 백제시대 절이 있다. 여기에 보물45호로 지정된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으로 불리는 석조 불상 1구와 더불어 석조 광배가 놓여있다. 이는 백제시대 최대 최고의 기념비적인 걸작이며, 원각여래좌상의 형태와 거신 광배는 익산 백제 장인의 독창적인 작품이다.

석불은 건물 내부 중앙의 가공된 지대석 위에 별도로 만든 좌대를 놓고 그 위에 결가부좌한 여래상을 올렸다. 이 석불은 머리만 본래의 것이 아닐 뿐 불신(佛身), 대좌(臺座), 광배(光背)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시대 작품이다. 머리 부문을 제외한 몸체의 높이는 156㎝이며 순수한 광배 높이는 3.26m로 우리나라 불상의 광배 중에서 가장 크다.

석불은 당당한 어깨, 균형 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 하면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자락은 길게 내려져서 사각형의 대좌를 덮는다. 손의 형태는 오른손을 무릎 위에 가볍게 올려놓고, 왼손은 가슴에 댄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석불의 뒤에 별도로 놓인 배 모양의 광배는 머리뿐만 아니라 몸체까지 함께 빛을 표현한 거신광배(擧身光背)이다. 광배의 중앙에는 둥근 머리광배가 볼록 나와 있고 그 안에 백제의 수막새에서 볼 수 있는 열여섯 개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바깥에는 방사선으로 퍼진 특징이 있다. 몸 광배도 볼록하게 나와 있고 바깥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일곱 분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이 석불상은 대좌의 모습과 광배에 새겨진 무늬를 볼 때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시대 훼룡문계(虺龍文系) 불꽃무늬는 금동불상과 더불어 서산마애삼존불과 같은 석불상에서도 나타나는데 연동리 석불좌상의 석조광배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이는 법륭사 금당의 석가삼존불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일본 아스카시대(飛鳥時代) 조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몸체 위에 놓여 있는 석불의 머리는 근래에 만든 볼품없는 것으로 외관을 크게 훼손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망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 불상은 백제시대 우리나라 최대이며 최초의 돌로 만든 원각여래좌상(圓刻如來坐像)으로서 서산과 당진에 있는 석조 불상의 유례와 더불어 우리나라 석상 조각의 기원으로 추정된다.

연동리의 불상과 광배는 우리나라 석불과 광배의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아가 일본 고대 조각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하는 점에서 우리나라 조각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불에는 목 걸고 왜군을 막아낸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금마에서 여산가는 1번 국도는 천 년 전에도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런데 파죽지세로 밀려온 왜군들은 금마지역에 들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왜군이 진격하려고 하면 안개가 끼어 대낮에도 칠흑 같은 어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왜군 장수는 부하를 시켜 알아보게 하였다. 이 주변에 석불만이 있다는 보고를 듣고 왜군 장수는 안개의 조화가 빛을 발하는 석불의 탓이라고 여기고 칼을 휘둘러 석불의 목을 베었다. 이 전설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이 석불의 두상은 원래 것이 아닌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소통뉴스 정명열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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