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RSS
맨위로

우리나라 최초 암막새?

[익산의 재발견 #14]제석사지 인동당초문암막새

등록일 2012년06월06일 19시25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1993년 제석사지 시굴조사 시 금당지에서 출토된 연화문수막새(위), 인동당초문암막새(아래)

익산 제석사지(사적 제405호) 출토 인동당초문암막새는 우리나라 최초의 암막새이다. 암막새는 중국이나 고구려에서 만든 적이 없고 신라에서도 없었던 것으로 백제인이 창조한 것으로 세계에서 처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화려하고 우아한 인동당초문암막새는 제석사지에 대한 1993년 시굴조사에서 확인되었으며 2008년 본격적인 조사에서 금당지의 기단 외부에서 기와파편과 함께 다량 출토되었다.

인동당초문 암막새는 중앙의 정형화된 귀면문(혹은 용문)이 시문돼 있고, 좌우 양측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인동당초문은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보여 지는 당초문과 닮아 있다.

초기 기와의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누른 지두문암막새를 제외하면 가장 이른 시기, 7세기 중엽 당시 새롭게 선보인 건축부재로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물 중의 하나이다.

1993년도 시굴조사(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제1차 발굴조사(2007,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출토된 인동당초문암막새는 그 제작시기를 두고 백제냐 통일신라냐 라는 논란을 야기 시킨 바 있다.

삼국시대에는 수막새만이 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였으나 간혹 확인되는 암키와의 끝을 구부리거나,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드림새처럼 처리한 암키와편들을 암막새의 기원으로 보고 있던 차에 발견된 제석사지 출토 인동당초문암막새는 기와학계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기와의 질이나 소성정도, 포목흔, 정면․접합수법 등은 백제의 기와임에 분명하나 장선의 평행집선문이 살펴지는 등문양과 내면에서 관찰되는 통쪽와통 흔적의 부재는 백제기와임을 단정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이와 같은 암막새는 제석사지 금당지 주변에서 상당수 확인되었으며 제석사폐기장(639년 화재로 불탄 잔재들을 매립한 유적, 익산시 향토유적 제2호)에서는 한점도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제석사 초기가람(639년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고 그 이후 중건가람에 사용되었으며 제작 시기는 백제 말기(7세기 중반)로 판단된다.

제석사의 암막새의 조형은 그대로 일본으로 건너가 법륭사를 비롯한 초기 여러 사찰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하면 제석사지는 백제 제30대 무왕(A.D. 600~641)이 익산으로 천도하여 세웠으나, 정관(貞觀) 13년(639년) 뇌우(雷雨)로 인하여 불당(佛堂)과 회랑(回廊) 등이 불탔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백제 왕실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제석사지의 정비를 목적으로 1993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현재 3차에 걸친 발굴조사(2007년~ 현재)가 진행 중이다.

소통뉴스 정명열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올려 0 내려 0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최신뉴스광장

전체 뉴스종합 10대핫뉴스 오피니언

포토뉴스

기부뉴스

여러분들의 후원금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듭니다.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현재접속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