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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 보고 듣는 '익산문화재 이야기'

미륵사지 창건설화, 간재 전우선생 묘소, 구룡마을 대나무 숲 등

등록일 2011년10월19일 17시31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동양 최대의 사찰 미륵사지

미륵사는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때 창건된 동양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창건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를 가던 중 용화산 아래 큰 못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기에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왕비가 못을 메우고 큰 절을 세울 것을 소원하므로 무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평지를 만들고 세운 것이 미륵사이다. 국보 제11호인 동양최고의 미륵사지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다. 특히, 2009년 1월에 국보중의 국보인 사리장엄과 금제사리봉안기, 금제장식 등이 발굴되었다.

아흔아홉 배미 논

전주 이씨 집안에서 조선시대부터 1960년 초까지 농사를 지었다는 삿갓논(조각논).

아흔아홉(99)배미 맨 윗 논 부근엔 옻샘이라는 샘물이 있는데 옻이 탔을 때 이 샘물에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낫는다는 설이 있다.

옛날 부자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99칸(방 99개) 이상을 지을 수가 없었는데 100칸인 궁궐보다 방을 많이 만들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이유에서 백(100)배미를 채우지 않고 아흔아홉(99)배미 논을 소유했을 거라 추정된다. 1980년대에 변씨 집안으로 소유권이 이전되면서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고 있다.

간재 전우 선생 묘소

조선후기 성리학의 대가 임헌회의 문하에서 20년간 학문을 닦았으며 1882년(고종19) 관직에 나갔으나 곧 사임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부안․군산 등 여러 섬을 옮겨 다니다가 국권이 피탈된 후에는 계화도에 정착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냈다. 돌아가신 후에 증조부 묘소가 있는 이곳 선산에 매장되었다.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 되었다.

죽청마을

대밭이 많아서 푸르다 하여 '대파라니→죽청' 이라는 설과 또 바로 옆 골짜기 이름이 '큰골' 이고 예전에 널찍한 곳을 대판이라 했으니 그런 뜻의 '대판이' 라는 설도 있다. 인근에 태봉사와 미륵산 자연학교 등이 있다.

심곡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 본래 현 위치에서 산위로 200m쯤 올라간 곳에 있었으나 100여 년 전에 옮겨졌다.

신라 문성왕 때 무염이 창건하였으며 19세기 초반에 허주가 증건 했고 1983년에 산신각을 삼성각으로 고쳐 지었으며 1984년에는 요사를 새로 지었다. 1985년부터 2년간 대웅전을 해체하여 증수하고 1997년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미륵불상을 조성하였다.

구룡마을 대나무 숲

전체 면적이 5만㎡으로 한강 이남에서는 최대 규모이다. 주요 수종은 왕대이며 일부 구간에 오죽 또는 분죽이라 부르는 솜대가 분포하고 있다. 이곳 대나무로 만든 죽제품은 우리나라 3대 5일장의 하나였던 강경장을 통해 충청도, 경기도까지 판매되었으며 생필품을 만들어 썼기에 생금밭이라 불리기도 했다.

2005년 겨울에 냉해를 입어 왕대가 거의 고사되는 위기를 겪었으나 2006년부터 마을주민과 산주, 지자체, 전북생명 숲 등이 고사된 대나무를 제거하고 생육환경을 개선하면서 복원되는 과정에 있다. 드라마 ‘추노’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화산서원

화산서원은 금마면 용산리 신기마을(전라북도 교육연수원뒤편)에 소재하고 있다.

1657년(효종8년) 창건되었으며 김장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662년(현종3년) 사액서원이되었고 1695년(숙종21년) 송시열을 추가 배양하였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8년에 복원 되면서 소두산, 소휘면, 황자후를 추가 배양 하였다.

양곡 소세양 신도비

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 용화저수지 뒤 북쪽에 위치해 있다. 도유형문화재 제159호 로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소세양선생의 행적을 적었다.

소세양은 연산군 10년에 진사가 되고 중종 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인종 때 윤임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가 명종이 즉위한 후 다시 임용되어 좌찬성까지 올랐다. 문명이 높고 율시에 뛰어났으며 조선의 명기 황진이의 연인이었다. 소세양과 이별의 아픔을 쓴 황진이의 시가 가수 이선희의 ‘알고싶어요’로 번안되어 불려지고 있다.

서동공원

금마저수지를 끼고 있는 시원한 조각공원인 서동공원은 한여름을 가로지르는 자전거하이킹과 산책을 즐길 수 있으며,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조각상과 “서동요” 조각을 비롯한 98점의 조각들을 만날 볼 수 있다. 중앙광장에는 무왕 동상이 위치하고 있고, 십이지신상 조각을 보며 그 의미 또한 새기며 사진을 찍어 볼 수 있어 한층 재미가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가람이 태어나고 생을 마친 곳으로 지방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4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수형이 아름다운 탱자나무와 소박한 정자,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한 연못, 그리고 초가지붕을 얹은 목조 가옥이 소박하고 검소한 선생의 삶을 잘 담아내고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현대시조의 중흥을 일으킨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서울대교수 등각 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한 가람은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했으며, 시조시인으로서 현대적 시풍을 확립한 업적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성당포구

금강변 성당포구는 호남평야의 세곡을 실어 나르던 큰 항구로 한때는 전국 9대 조창에 꼽힐 만큼 흥성했던 곳으로 지금은 길가 벽화가 번성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이른 아침에 배를 타고 나아가 갈대숲 사이로 물안개와 함께 떠오르는 일출은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금강변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마을 뒷산에는 고란초 군락지가 있다. 배를 타고 멀리 금강하구둑까지 가면 금강변 끝 다리 위에 걸친 노을은 금강의 명물이다. 마을주민들은 인심 좋고친절하며 농촌체험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풍년농사, 풍어 그리고 성당포구에서 출발하는 조운선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당산제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109호인 은행나무가 있다.

나바위 성지

1845년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고 주교와 다블리쉬 안 신부, 11명의 조선 교우들과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이것을 기념하여 1897년 본당이 설립되었다. 목조와가에 한식과 양식을 조화롭게 절충한 아름다운 성당이 1906년에 세워졌다. 국가지정문화재(사적 318호)로 지정된 나바위 성당에는 제대와 남녀 좌석을 구분한 칸막이 흔적 등 초기한국교회의 전통적인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소통뉴스 정명열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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