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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을 농정에 담는 살림꾼이 되고 싶습니다

등록일 2008년09월03일 00시00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1. 당선 소감

개표하던 날, 자정을 넘기며 개표장에서 초조와 긴장, 절망으로 밤을 새는 농민회원들에게 정말 미안했습니다. 새벽 3시가 되어서 당선이 확정되었을 때 목 놓아 우는 회원들에게 정말 송구스러웠습니다. 낮은 점수를 받은 성적표를 부모님께 내미는 수험생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낮은 성적표지만 농민의 염원이 담긴 성적표라 믿고 싶습니다. 언제나 몰라서, 없어서 핍박받는 농민들의 귀가 되고 눈이 되어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라는 강한 요구라고 믿고 싶습니다.

우리 농민은 항상 농민의 문제를 정치하는 사람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맡겨놓곤 밖에서 아우성치기만 했습니다. 이제 농민문제를 푸는데 농민이 나서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농민 문제를 앞장서 해결하는 농민문제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다 하겠습니다.

2. 그동안 걸어 온 길

전북 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포항제철에 취업하여 연구하고 노력하는 공학도로 경제도약을 위해 용솟음치는 우리나라의 산업역군이 되고 싶었습니다. 독일 뒤셀도르프 만네스만 제철소에서 선진 기술을 전수 받으며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익혀야겠다는 열망도 컸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평생 농삿일로 뼈빠지게 일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제 부모님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습니다. 20년전, 독일은 이미 주5일 근무제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저는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그 중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농촌의 그림 같은 정경이었습니다. 도농간의 격차, 계층간의 격차를 실감하며 부모님이 몸값으로 주신 탄탄대로를 포기하고 노동자, 농민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고자 결심했습니다.

오토바이 꽁무니에 달랑 옷가방 하나 싣고 돌아온 저의 귀향은 작은 시골마을의 이야기꺼리였습니다. 젖소 사육으로 저의 귀농생활을 시작했으나, 저의 가장 큰 관심사는 ‘변화하는 농촌, 살기좋은 농촌’ 이었습니다. 카톨릭 농민회가 전국 농민 연합으로 편성되며 익산군 농민회 왕궁지회를 결성하며 농민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수세폐지 투쟁위」를 맡아 수세페지에 앞장섰으며, 「추곡 전량수매 대책위원장」을 맡으며 설날도 반납하고 추운 겨울 4개월을 야전 생활하면서 전량수매 투쟁을 위해 싸웠습니다.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면서 왕궁면은 혐오시설 유치장으로 변하여 갔습니다. 주민의 여론은 수렴하지 않고 넓은 국유지가 있어 쓰레기 소각장을 세우기에 적합하다는 행정 편의적인 발상에 대처하여, 「쓰레기소각장 유치 반대 대책위」를 꾸려 농업이 주민 생계유지의 주업인 왕궁면에 쓰레기 소각장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당위성을 피력하여 그 계획을 무산시켰습니다.

지난 2004년, 왕궁면 바울RPC 부도로 왕궁면, 여산면, 망성면 주민 150여 세대가 나락값 3억원을 떼이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바울RPC 피해 농가 대책위원회」를 꾸려 6개월간의 싸움 끝에 피해 금액 전액을 받아 주었습니다. 또한 2005년 선하지 보상권의 개념도 알지 못하는 농가를 대상으로 한전의 소액 보상과 맞서 주민의 생활권을 보장하도록 4억 5천만원의 보상받도록 힘썼습니다. 제시한 두 사건은 법률 지식이 부족한 농민들에 대한 기업의 횡포였기에 더욱 마음 아팠던 사건이었습니다.

5·31 선거 공보물을 제작하면서 공보물 내용이 <투쟁을 위한 삶> 같다며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항변하고 싶습니다. <삶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3. 시민들이 뽑아준 이유는?

저를 뽑아준 분들은 시민들이라기보다는 <진정으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노동자, 농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농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농민입니다. 민족 농업을 사수하는 농군(農軍)입니다. 쌀 시장이 개방되며 사지(死地)로 내몰리는 농민이 살길을 찾자고 저를 앞세운 것입니다.

15년전 중앙아메리카의 온두라스가 쌀시장을 개방하였습니다. 오늘날 온두라스의 농민은 도시 빈민으로, 도시 노동자로 전락하여 더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값싼 쌀 수입 개방의 길을 택한 온두라스는 국민의 먹을 거리를 지키지 못하여 현재는 비싼 쌀을 사먹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온두라스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밀시장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무상 원조에서 값 싼 밀로 바뀌면서 우리나라의 밀농사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먹는 수입 밀값은 어떠한가요?

제가 농민을 農軍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논농사를 지켜내지 못하면 온두라스처럼 15년이 걸리지 않더라도 불 보듯 뻔한 현실을 맞게 됩니다.

제가 사 선거구의 당선자가 된 까닭은 20년간 싸웠어도 변함없는 농촌 문제를 풀어 가는 농민을 사랑하는 농촌의 일군이 되라는 농사형제의 굳은 결의라고 생각합니다.

4. 선거기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일은?

남발하는 공약과 공약에 현혹된 지역, 집단 이기주의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상대 후보에 비해 그렇지 못한 초선 후보는 ‘우리 마을에, 또는 내가 속한 집단에 무엇을 어떻게 해준다더라’ 식의 표몰이식 선거운동에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내 지역, 내 집단에 큰 감을 놓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감수해야한다는 보다 폭넓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농촌 지역에서 지도자의 역할은 아주 큽니다. 이 번 선거를 치루면서 지도층의 기울어진 편견이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선거구만 중선거구가 될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영역도 중선거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 임기 4년동안 꼭 이루고 싶은 것

시의원의 역할을 굳이 가정 살림에 비유하자면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공부 잘하고, 몸 건강한 자식보다는 공부 못하고 몸이 약한 자식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고 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농민 후보」라 불렀습니다. 상대적 차별을 받는 농촌, 농업, 농민을 위해 4년을 몸바쳐 일하고 싶습니다.

우선 농심(農心)을 농정(農政)에 담는 살림꾼이 되고 싶습니다. 농민의 문제를 농민 대표 없이 논의하였음으로 농민들은 항상 소외된 계층의 대명사였습니다. 저는 농민 대표로 농민 문제 해결에 혼신을 다하겠습니다.

둘째, 도농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힘쓰겠습니다. 교육을 비롯하여 노인 복지와 문화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도농 간의 격차를 줄이는 일은 정부가 지향하는 사회 양극화 현상 해소를 위한 방편입니다. 특히 열악한 교육환경 개선과 노인 복지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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