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쌍릉(사적 제87호) 대묘(대왕릉)에서 확인된 인골의 주인공이 미륵사 창건과 익산(금마) 천도를 이끈 백제 무왕(재위 600∼641)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그동안 규모가 큰 대왕릉을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의 무덤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했는데, 이번 인골 분석 결과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쌍릉 대묘(대왕릉) 석실 벽면 조사 모습
18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에 따르면 지난 4월 익산 쌍릉(대왕릉)에서 발견된 인골에서 남성 노년층의 신체특징과 병리학적 소견을 확인했다.
익산 쌍릉은 현재 익산시 석왕동에 위치해 있는 백제 시대 무덤으로, 대왕릉과 소왕릉이 180m 가량 서로 떨어져 있으며, 서동설화는 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연하여 왕위에 오르고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향가 ‘서동요’의 배경 설화이다.
쌍릉의 존재는 ‘고려사’에서 처음 확인되며, 고려 충숙왕 때(1327년) 도굴되었다는 사건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부터 고조선 준왕이나 백제 무왕의 능이라는 설이 있었다. 1917년 조선총독부는 쌍릉을 단 며칠 만에 발굴하면서 백제 말기의 왕릉이거나 그에 상당한 자의 능묘라는 것은 확인했지만, 1920년 고적조사보고서에 단 13줄의 내용과 2장의 사진, 2장의 도면만 공식기록의 전부로 남겨놓았다.
목재 유골함과 인골파편 발견 당시 모습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8월부터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의 하나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익산시와 공동으로 쌍릉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석실 끝부분에서 여태까지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없던 인골 조각이 담긴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100년 전 일제가 발굴하면서 다른 유물들은 유출한 반면, 이는 꺼내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 인골자료가 무덤의 주인과 연결된다면, 백제 무왕의 능인지를 결정짓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고고학과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관련 전문가들을 모두 참여시켜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의 수종 등을 정밀 분석했다.
102개의 조각으로 남아있던 인골을 분석한 결과, 성별은 남성인 것으로 조사됐다. 팔꿈치 뼈의 각도(위팔뼈 안쪽위관절융기 돌출양상), 목말뼈(발목뼈 중 하나)의 크기, 넙다리뼈 무릎 부위(먼쪽 뼈 부위)의 너비가 남성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넙다리뼈의 최대 길이를 추정하여 산출한 결과 키는 161㎝에서 최대 170.1㎝로 추정된다. 훨씬 후세대에 속하는 19세기 조선 시대 성인 남성의 평균키가 161.1㎝인 것을 감안한다면 비교적 큰 키이다.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무왕에 관한 묘사로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고 되어 있다. 639년에 작성된 미륵사지 서탑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대왕폐하’로 불린 기록도 있다.
넙다리뼈 무릎부위 마이크로 CT이미지
나이는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목의 울대뼈가 있는 갑상연골에 골화가 상당히 진행되었고, 골반뼈 결합면의 표면이 거칠고, 작은 구멍이 많이 관찰되며, 불규칙한 결절이 있다.
남성 노년층에서 발병하는 등과 허리가 굳는 증상(광범위특발성뼈과다증), 다리와 무릎의 통증(정강뼈와 무릎뼈의 척추외골화)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옆구리 아래 골반뼈(엉덩뼈능선)에 숫자 1(∣) 모양으로 골절되었다가 치유된 흔적이 있다. 어긋나지 않아 타격보다는 낙상 등 때문으로 판단된다. 치료기간이 3개월 정도 되므로, 직접적인 사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가속 질량분석기(AMS, Accelerator Mass Spectrometer)를 이용한 정강뼈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보정연대가 서기 620~659년으로 산출되어 인골의 주인은 7세기 초중반의 어느 시점에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뼈가 심하게 부식되어 유전자 분석은 쉽지 않았다. 추출한 콜라겐의 탄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으로 벼, 보리, 콩의 섭취량이 높았음을 알 수 있었고,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으로는 어패류 등의 단백질 섭취도 확인했다.
익산은 질 좋은 화강암의 산지로 유명한데, 석실의 석재는 약 9㎞ 떨어진 함열읍에서 채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령이 400년 이상으로 알려진 관재(棺材)는 늦어도 7세기 전반 이전에 벌목된 것을 가공한 것이다. 목관은 최고급 건축・가구재인 금송으로 제작했으며, 이번에 발견된 유골함은 잣나무류의 판자로 만들었다.
최신 공학기술이 반영된 이번 연구에서는 뼈의 3차원 입체(이하 3D) 모형화와 3D 프린팅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한 디지털 자료도 구축했다.
쌍릉(대왕릉) 봉분 조사전 모습
▲600년에 즉위하여 641년 사망했다는 무왕의 재임 기록으로 보아 10대나 20대에 즉위한 경우 무왕의 사망 연령이 남성 노년층으로 추정되는 쌍릉의 인골 추정 연령과 비슷하며, ▲사망 시점이 7세기 초반부터 중반 즈음이라는 인골 분석 결과는 익산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같은 시기에 왕권을 확립한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가능성을 한걸음 더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연구를 바탕으로 익산 쌍릉의 성격과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규명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며 “아울러 익산지역의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 사업을 통해 백제 왕도의 역사성 회복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