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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축제 정체성 논란 ‘무지의 소치’

미륵사 창건 시대와 내력, 삼국유사와 일치

등록일 2009년01월21일 18시08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굴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는 백제 무왕의 왕후를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최고 관료의 딸로 기록하고 있어, 무왕 서동과 왕후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에 대한 진실성 논란이 일고 있으나 이는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한 것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지적이다.

백제시대인 639년에 미륵사지 석탑에 봉안 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미륵사를 세운 사람이 백제 무왕의 왕후이자 당시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 사택적덕의 딸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 알려진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후가 된 뒤 미륵사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 배치된다는 게 논란의 진원이다.

문제의 문장부분에 대해서는 판독자에 따라서 금제사리봉안기의 “우리 백제 왕후께서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해석하는 견해와, “우리 백제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해석하는 견해로 나뉘고 있다. 사학계의 또 다른 견해는 백제 무왕의 재위기간(600~641)이 길고 미륵사를 세운 639년은 임기 말년에 해당되므로 선화공주와 먼저 결혼한 뒤 훗날 사택적덕의 딸을 다시 왕비로 맞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 마한백제연구소 소장인 김삼룡 박사는 “문장 해석을 위한 고찰은 연구관제에 해당된다”며, “하지만 이 문장의 조사는 ‘께서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학문적으로 가깝고, 백제시대의 문화적 배경 상 지위가 높은 왕후의 공을 더 추앙했을 것으로 사료 된다”고 견해를 피력했다.

김 박사에 따르면, 우선 문맥상 사택적덕의 딸로 해석할 경우라 하더라도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과 미륵사 창건에 관한 내용은 일치한다.

그 근거로 우선,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비가 된 후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던 중 미륵삼존 봉안을 제안한 세군데 기록과 미륵삼존이 출현한 곳이 연못으로 되어 있고 이곳을 메꾼 사실이 증명되어 삼국유사와 일치한다.

또, 사자사(현 사자암)를 조사 발굴하면서 절터와 명문와당이 발견되었고, 미륵사 창건의 원인을 제공한 사자사에서 무왕과 선화공주가 만난 내용에 대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고 지명법사가 사자사에 거주한 기록 역시 명백하다는 것이다.

김박사는 또 “서양의 경우 신화나 설화를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면서, “확실히 드러난 사실은 이번에 밝혀진 미륵사와 석탑의 창건 사실이 삼국유사의 기록과 동일하게 밝혀졌고 서동과 선화에 대한 삼국유사가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게 됐다”고 역설했다.

김선기 전라북도 문화재 위원은, “사리봉안기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서동과 선화공주가 먼저 결혼을 한 후에 무왕의 임기 말에 사택적덕의 딸을 다시 왕비로 맞아들였을 가능성도 고려해 보게 하는 기록이다”고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또 “삼국사기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삼국유사의 서동선화의 첫 혼인 기록과, 이번에 발견된 무왕의 사택적덕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사리봉안기의 기록 두 가지 모두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면서, “서동축제 정체성에 문제를 삼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이러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고 일축했다.

소통뉴스 오삼규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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