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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유래와 황등호의 재조명-Ⅱ

시민 모두가 행복한 문화관광의 매력 넘치는 익산 만들기

등록일 2006년10월17일 00시00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우리나라의 8도(八道)를 구분하는 큰 지명은 대체적으로 영(嶺)과 호(湖)를 경계로 하여 불려졌다. 영의 경우 영동, 영서, 영남 및 관 여기에서의 관(關)이란 철령(鐵嶺)이란 산 고개에 설치한 것 즉 철령관(鐵嶺關)을 지칭하기에 실제적으로는 영이 기준이라 할 수 있다.
동, 관서, 관북, 호의 경우 호남, 호서, 호북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한편 강(江)이 위치한 지역은 그것을 경계로 지역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서울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 강북, 강동 및 강서라고 부르는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여기에서는 호남(湖南)에 대한 유래(由來)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 황등호(黃登湖)와의 연관성을 살펴 본 후 현대사적인 의미에서 황등호를 재조명(再造明) 해보고자 한다.


글싣는 순서
Ⅰ. 호남의 유래
Ⅱ. 황등호의 재조명


Ⅱ. 황등호의 재조명

1. 황등의 유래

황등(黃登)이란 “큰 구릉(丘陵)의 등성이”라는 뜻이다. 옛날의 익산군 남이면(南二面)과 동이면(東二面) 및 북일면(北一面) 일대에는 허허로운 넓고 넓은 평야지대가 연이어져 있었다. 그 옆의 드넓은 황등 저수지인 요교호(腰橋湖)쪽에서 황등 시가지가 있는 황등석산(黃登石山)을 바라보면 마치 어마어마하고 웅대한 구릉인 산등성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 웅장하게 “큰 등성이”를 간략하게 줄여서 표현한 말이 “한등이”였을 것이다. 원래 “한”이란 말의 옛말 뜻은 “크다” “많다”란 의미를 가진 고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한국”도 “크고 위대한 나라”란 뜻이다. 이 “한등이”를 자주 입에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황등이”로 변하게 되었다.

“한”이란 음이 “황”이란 음으로 변한 것으로 예를 든다면 “황소(黃牛)”가 있다. “큰 소의 수컷”을 “황소”라 하는데 원래는 “크고 힘이 세다 하여 한소”라 했다. 그 “한소가 황소”로 바꿔진 것이다. 그와 같은 예로 “한등이”도 어느 사이에 “황등(黃登)이”가 되고 말았다. 즉 “황등이”는 한자의 뜻하고는 관계없이 “크고 웅장한 구릉”의 등성이가 있는 고장을 나타낸 말이다.

2. 황등호의 위치

익산 시내에서 원광대학교와 원불교 총부를 지나 강경으로 통하는 국도 23호를 따라 황등 쪽으로 가다보면 현대식 시멘트 다리가 나오는데 이를 ‘허리다리(腰橋)’라고 한다.
요교호(腰橋湖, 일명 龜橋湖 또는 황등호)를 가로질러 제방을 축조하였는데 이를 황등제(黃登堤)라 한다. 황등제는 일제강점기 때에 요교호 안쪽을 가로질러 도로를 만들기 위하여 황등산과 원불교 총부가 자리 잡고 있는 도치산 줄기 사이를 연결하여 쌓았던 약 1,300여m의 제방이다. 이 호수는 오늘의 삼기면과 팔봉동 및 황등면의 넓은 들을 차지했던 요교호라고 불린 큰 호수로 나룻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고 한다.

『여지승람』에는 요교호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는 호수의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보여 진다. 요교호에 황등으로 이어지는 제방이 도로 역할을 하게 되다 보니까 요교호와 황등제를 같이 사용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예로부터 익산시 황등면과 군산시 서수면, 임피면 일대의 평야는 비옥한 미작경지(米作耕地)로서 그 수원을 황등호(黃登湖)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황등호는 개.보수는 물론 관리마저 제대로 되지 않고 방치돼 토사 매몰이 가속화되면서 저수지로서의 모습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옥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일본인이 1909년에 임익(臨益)수리조합을 설치하고 황등제 복구를 목적으로 제방을 증축,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요교호에 황등제가 축조된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조사 자료인『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1923년에 용산성 익산시 황등면 용산리에 있는 옛 산성.
의 석재를 빼어 황등제 수축에 이용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황등제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축조되었던 것이다.
황등제는 수리(水利) 현대화의 첫걸음이었고 다른 측면에서는 일본의 농업분야 침탈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1935년에 완주군 경천저수지가 완공되면서 황등제는 다시 도로로서의 역할만을 맡게 됐다.

요교호가 정확하게 언제 생기고 폐지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백제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확실한 것인지는 단정 지을 수 없으나, 이 황등제가 있는 지역의 바로 인근에 황등면의 도선(배 나들이, 渡船), 백길(뱃길, 白吉), 섬말(섬 마을, 島村) 마을과 같이 수로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 보이며, 요교의 바로 남서쪽에 어은리라는 곳이 있어서 금강과 만경강을 이용하여 미륵사로 들어오던 임금이 잠깐 머물렀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 아닌가라고 보여, 이 지역 또한 수리로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곳으로 보여 진다.

3. 황등호의 발원지

금천(錦川)은 미륵산의 서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였다. 익산시 삼기면 간촌리에서 구문천(九文川)과 장항천(獐項川)과 합류하여 황등면 연전평(蓮田坪)을 지나 신창진(新倉津)으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이 하천 역시 황등제가 있었을 때는 요교호로 흘러 들어가던 하천이다. 예전에는 이 하천의 유역에서 토탄(土炭)이 많이 생산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하천의 지류인 구문천 유역에는 옛날에 속칭 ‘번지(藩池)’라고도 불리워지던 상실연(上失淵)이라는 큰 못이 상.하 둘이 있었다고 하는데, 언제 없어졌는지 지금은 그 터만 지명으로 불리워지고 있다.『여지승람』에도 못이 없어진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황등제가 없어진 후에 생긴 못으로 짐작이 되나 없어진 시기에 대하여서는 알 도리가 없다. 이 하천의 하류지역은 황등천(黃登川)이라 부르기도 한다.

4. 황등호의 현대사적 의미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 유형원은『반계수록』에서 “김제의 벽골제와 고부(현 정읍)의 눌제, 그리고 익산.전주의 사이에 있는 황등제는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제언(堤堰)으로서, 이들은 나라 한쪽에 큰 이익을 주는 제언이므로 국력을 크게 기울여 축조한 것이다. 이 세 곳의 제언을 축조해 놓으면 노령정맥 이북의 땅은 영원히 흉년이 없게 되는 것이며 호남지방의 만물은 가히 고목이 소생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또 노령 이북의 땅이 영원히 흉년이 없게 되면 바로 온 나라 만세에 큰 이익이 되는 것이니 이 나라 조세의 대부분이 호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 문헌에서 호남 즉 전라도의 삼호(三湖)는 모두 전라북도에 위치하고 있다.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남쪽에 눌제, 중간지대에 벽골제 그리고 북쪽에 황등제가 있다. 이중 황등제는 익산시에 있는데, 이곳은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아니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익산은 한양(서울) 쪽에서 볼 때 호남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국도 1호도 익산을 경유하고 있다. 결국 전라도라 칭하는 호남은 지역적으로 보면 바로 익산의 이남(益南)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현대사적인 의미로 볼 때 익산에 그 옛날 황등제가 있었기에 호의 남쪽(湖南)의 정확한 분기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현재 금강의 상부 일부가 전라북도(장주.무주)에 위치하고 있고, 강경 밑의 일부분만 충청남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을 뿐 강의 대부분에 속하는 중심 부분은 충청 남.북도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지역구분이 현재와 달랐기 때문에 충청도의 일부 땅도 호남지역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호남이라는 명칭도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구분하는 행정구역이 평야와 산을 중심으로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는 만큼 익산 땅에 있는 황등호를 호남의 상징적 의미의 발원지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세월이 변하면 그 시대적인 의미도 현시대에 맞게 재조명 되어야 호남의 명칭도 더욱 빛날 것이다.

5. 황등호의 복원사업

서울특별시는 조선시대의 중요 하천인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경기도 고양시는 일산에 호수공원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은 사업들은 추진 전에 찬반양론이 팽배하였지만 새롭게 단장한 청계천은 수도의 또 다른 명물이 되었고, 호수공원은 시민의 휴식과 여가문화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역사적인 문화유적을 발굴보존하자면 자료의 고증에서부터 현대에 어울리는 복원에 이르기까지 걸쳐야 할 단계가 많다. 여기에서는 복원의 필요성과 복원 사업계획 및 사업효과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그 이외 것들은 능력의 한계 상 현재 진행형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1) 복원의 필요성

① 호남 지명의 유래를 찾고 ‘호남의 일 번지’로서의 위상 정립
② 전국과 세계에 익산시의 역사유적을 홍보하고 관광 상품화
③ 각종 수리시설 발달사의 산 교육장화
④ 수리민속 유물을 수집, 보존하고 유실, 멸실 및 훼손방지
⑤ 도심 속의 쾌적한 시민휴식 공간 마련을 통한 ‘문화관광 매력도시’로의 탈바꿈

2) 복원 사업계획

① 호남의 유래지 이자 전라도의 3대 저수지인 ‘황등호’ 복원사업
예) 서울의 청계천 복원사업, 고양시의 일산 호수공원화사업 등

② 황등제의 제방(堤防) 및 중앙, 좌, 우의 ‘수문(水門)’ 복원사업
예) 김제의 벽골제 : 장생거, 경장거 수문 - 국사책 수록

③ 호남의 유래지를 상징하는 ‘기념탑(記念塔)’, 기념비(記念碑), 대형홍보판 건립사업
예) 황등호, 호남고속전철, 호남고속도로의 상징물의 조형물화

④ 우리나라 최고의 농경 수리문화유적 발굴 및 보존을 위한 ‘농경박물관’ 신축사업
예) 김제의 수리민속 유물전시관

⑤ 호남을 상징할 수 있는 ‘관문(關門)’을 국도 23호선에 건립사업
예) 전주의 호남제일문, 임실의 사선문

⑥ 호수 주변의 레포츠시설 설치 등 종합관광레저단지 개발사업
- 뱃놀이, 분수대, 산책 및 하이킹코스, 야외문화공연장 등
예) 전주의 덕진 연못, 군산의 월명호수, 청주시 오창 호수공원화사업, 대전시 생태호수공원 조성사업 계획 등

3) 사업효과

① 호남 지명의 유래지에 대한 의식고취를 통한 ‘호남의 일 번지’로써의 자긍심 고취 및 위상 정립
② 농경문화와 역사유적을 발굴 보존함으로써 전국은 물론 세계에 그 우수성을 홍보하여 산 교육장화 및 관광 상품화
③ 왕궁의 궁터 유적지, 금마의 미륵사지, 웅포의 입점리 고분군 등 백제문화권 관광벨트와 연계한 ‘문화관광 매력도시’로의 발돋움
④ 도심주변의 호수조성을 통한 쾌적하고 편안한 시민휴식 공간을 마련하여 시민 모두가 행복한 도시 만들기에 분위기 조성

* 참고문헌
- 익산문화재대관(익산문화 총서 13), 익산문화원, 1999.
- 익산의 전래지명고(익산문화 총서 14), 익산문화원, 2000.
- 익산향토지1, 익산문화원, 2005.
- 익산의 선사와 고대문화,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익산시, 2003.
- 다시 쓰는 택리지2(팔도총론-전라.경상편), 신정일, 2004.
- 호남 사상과 문화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학국공자학회 세미나 자료집, 2005.
- 조용헌의 살롱 ‘영호론’, 조선일보, 2006. 5. 22.
- 벼골의 문화유산, 김제문화원, 1999.
- 벽골제와 벼농사(증보판), 김제문화원, 2000.
- 사이트 ‘다음’, 익산시청, 전주시청, 나주시청, 고양시청, 김제시청, 청주시청, 대전시청 자료.
●이 글은 채수훈씨가 소통뉴스에 보내주셨습니다.
●채수훈씨 약력: 현, 전라북도 익산시 어양동사무소 사회복지 전담공무원. 원광보건대학 사회복지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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