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이영희의 만남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82년은 폭력과 억압의 정치가 최고조에 달했다.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은 ‘정의사회 구현’ 을 사칭하며 정의를 짓밟았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정치규제에 묶이고 양심적 정치인과 민주 인사들은 감옥에 갇혔다. ‘언론 통폐합 조치’로 언론은 정권의 나팔수가 되었고 극심한 학원사찰로 대학생들조차 잠잠하였다.

나는 우리시대 가장 암울한 시기에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다. 박정희의 반공교육 세례를 받고 성장한 나는 이 시대의 아픔에 그리 민감하지 못한 채로 그럭저럭 대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2권의 책을 소개받았다. 이영희 교수가 쓴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2권의 책을 단숨에 읽어 나가며 나는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오랫동안 교육받았던 반공교육과 역사교육이 준 사고의 틀이 일시에 깨져나갔다. 2권의 책이 우리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런 내가 지난 12월5일 이영희 교수 추모1주기를 맞아 자서전적 회고록인 ‘대화’를 읽을 수 있어서 큰 기쁨이다.

책 제목처럼 ‘대화’는 이영희 교수와 문학 평론가인 임헌영 씨의 대화를 통해 이영희의 출생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사건과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집필하였다. 통상적 자서전이 아닌 대화 형식을 통해 한 양심적 지식인이 살았던 시대, 겪었던 일들을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신선한 감동과 재미를 주고 있다.

‘대화’에 기록된 선생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가 살았던 시대를 정리해보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진실만을 추구한 실력 있는 언론인 이영희
통역장교로 6.25 전쟁 때 군대생활을 한 이영희 선생은 합동통신사에서 언론인의 삶을 시작한다. 이후 조선일보에서의 시간까지 그는 공부하는 언론인이었고, 진실만을 추구하는 언론인이었다. 외교부 관리들이 “이영희 만큼만 하라”고 인정했을 만큼 그는 공부하는 기자상을 보여주었다. 대충 보도 자료나 추측 기사만을 내보내던 다른 기자들과는 달리 특유의 성실함과 집요함으로 사건의 핵심과 본질에 접근해갔다. 이런 노력이 그를 특종 많이 하는 기자로 만들고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는 외신부에서 활동하며 세계의 변화와 흐름에 가장 빨리 가장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이런 행운에 분석적이고 치밀한 공부가 더해져 그는 세계사의 흐름을 감지하고 진단하며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인도 쿠바 등 제3세계의 등장과 변화에 집중하여 공부하였고, 중국혁명은 그에 평생의 연구대상이 된다.

그는 또 미국의 실체와 속살을 들여다보며 미국에 매우 부정적 사고를 갖게 된다.

뒤틀린 한국현대사는 미국 때문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해가는 시기였다.

그는 궁핍한 경제사정에도 당시 일상화되어있던 촌지를 거부하며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는 기자였다.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은 본인의 언급처럼 오직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중국문제 전문가 이영희 교수
천직으로 알고 일하던 언론사를 타의로 나온 뒤, 그는 43세에 한양대학교 교수가 된다.

중국 혁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던 이영희 교수는 한양대에 최초로 ‘중국문제 연구소’를 설립한다. 당시는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미국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가 급속도로 추진되는 시기였다. 아무리 반공을 국시로 내건 박정희 정권이라 할지라도 이런 세계사적 흐름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런 세계정세 속에서 이영희 교수는 ‘홍기’ ‘인민일보’등 중국에 관한 자료에 무제한으로 접근이 가능했고 이를 바탕으로 황무지였던 중국연구에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았다. 그의 연구는 특히 모택동과 혁명동지들을 통한 혁명이론의 실제적 적용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중국혁명연구의 개척자’라고 할만하다.

행동하는 지식인 이영희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으며, 말만 하고 행함이 약하다”는 것이 지식인들의 일반적 성향이다. 그러나 이영희 선생은 그의 전 일생을 통해 행동하는 언론인이었고 행동하는 교수였다. 그는 불의하고 폭압적인 정권에 온몸으로 항거했으며 시대의 아픔과 늘 함께 했다. 1964년 반공법으로 처음 구속된 후 10차례 정도 구속과 해직을 당하면서도 언제나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 있었다.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이 되고 있다.

이영희 대한 나의 작은 불편함
‘대화’ 속에 나타난 이영희 교수의 모습은 깐깐하지만 올곧은 선비이다.

자기절제와 정의로움, 학문적 부지런함과 나라사랑의 마음, 그리고 헌신의 모습까지 갖춘 큰 어른이시고, <르몽드>의 표현처럼 우리시대의 ‘사상의 은사’이시다.

70~80년대를 젊은이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이영희 교수의 책을 통해 우리 역사와 사회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은 나의 ‘사상의 은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화’에서 나는 이영희 교수가 확신하는 몇 가지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한국사회 문제의 거의 대부분을 미국과 기독교에 책임지우는 주장을 하고 있다.

나는 그런 확신과 주장이 너무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나는 모든 책임을 기독교와 미국에만 일방적으로 돌리는 지나친 환원주의에 매몰된 측면이 있다고 본다.

특히 그와 민주화 운동을 함께한 동지들 가운데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김재준, 장준하, 문익환, 안병무 ---

존경받기에 충분한 사람
몇 가지 이견과 불편함에도 나는 이영희 교수를 높게 평가한다.

그가 살아왔던 시대가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야만의 시대였다.

편함을 버리고 오직 진실을 추구하며 자유를 위해 온 몸으로 헌신했던 사람이다.

본인의 진단처럼 70%는 언론인으로 30%는 교수로 살면서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사람이다.

그는 존경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저자 소개
이영희 ; 1929년에 평북 운산에서 출생하여 한국 해양대학을 졸업한 후 6.25때 통역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합동통신과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역임하고 한양대 문리대 교수 겸 중국문제 연구소 소장을 함. 저서로는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베트남 전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