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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읽는 징비록(懲毖錄)』

등록일 2007년05월30일 00시00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서기 1592년 임진년 4월 13일(음력) 부산포에 상륙한 수만명의 왜군(倭軍)들은 힘없는 조선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것으로 임진왜란 7년전쟁 선전포고를 대신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명(明)나라를 치러가는 길이니 성문(城門)을 열고 길을 비켜달라는 왜군 적장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싸우다 그 자리에서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길을 내어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는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햇다.

임진왜란 피눈물의 반성기록

부산을 점령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 불과 20일만에 수도 한양에 도착했다. 4월 30일, 왜군 입성소식에 놀란 선조임금은 혼비백산해 백성들과 대궐을 버린 채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분노한 백성들은 임금과 조정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고 선조는 의주까지 파천해 명(明) 나라에 조선을 합병해 달라는 비굴한 추태를 서슴치 않았다. 임금과 조정을 백성들이 인정하지 않는 조선은 이미 나라가 아니었다.
1593년 정월 명나라 원군이 한양 땅을 되찾았을때는 성안의 백성들은 모두 죽고 병들거나 굶주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생지옥이었다. 더 기가막힌 대목은 왜군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虅淸正)에게 포로가 된 선조의 아들 임해군은 자신만 풀려날 수 있다면 왜국(倭國)의 요구를 다 들어주자고 했다.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가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싸우기는커녕 비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으니 어느 백성이 왜군과 싸우겠는가. 필자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선생의 징비록(懲毖綠)을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선생의 유언처럼 써내려간 처절한 이 증언은 분노와 회한, 비애감에 빠져 눈물없이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성없는 역사 또 되풀이

서애(西厓)선생이 후대(後代)에 준 이 준엄한 역사의 경고 「징비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고 있는가. 임진왜란을 겪고도 반성은 커녕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무능한 임금 인조와 조정은 불과 수년 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치욕의 수모를 당하고 만다. 청나라 왕에게 무릎을 꿇고 3번이나 절한 인조의 경우는 후세의 사가들마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게 하고 있다. 그 왜국의 후손들인 일본이 다시 재무장을 완료하고 한반도를 넘보고 있다. 길어봤자 3년 후, 일본 군국 핵심 프로젝트인 평화헌법 개정이 이뤄질 것이다. 동시에 핵무장이 선언될 것이고 징병제 실시와 24만 5천명 일본군 간부들의 기간편제가 즉각 100만 대군으로 재편될 것이다.
미.일 기본조약과 샌프란시스코 강화협상이라는 최후 고삐가 풀리는 날, 일본은 한국의 독도부터 점령하려 총공격을 펼칠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이미 수십차례 세상에 공표된 진부한 문건에 불과하다. 마침 얼마전 전후 총결산을 주창한 일본 핵의 선각자 , 90을 바라보는 나카소네 전 수상이 “헌법개정은 지금부터 내가 총대를 메고 앞장서겠다”고 선언했다. 본색을 드러낸 나카소네의 이 섬뜩한 발언에 필자는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저자는 바로 韓.日협력을 유달리 강조한 친한파(親韓派)의 거두가 아니던가?” 미래를 예견하고 대처하는 「징비록」을 이제는 우리 모두가 직접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왜냐하면 나라는 누가 기켜주는 것이 아니고 나부터 나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가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끝)

객원논설위원 박경철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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