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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왕도설의 증거 ‘왕궁리유적지’

관세음응험기에 ‘백제 무광왕(무왕) 지모밀지(금마)로 천도’기록

등록일 2015년07월21일 11시11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別都)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터'라는 말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익산읍지>의 문헌들이 익산을 지칭하는 단어들이다.

일본 도쿄 쇼오렌인 사찰에서 발견 된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무왕)은 지모밀지(금마)로 천도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김정호 ‘대동지지’에도 ‘본래 백제의 금마지인데, 무강왕(무왕) 때 성을 쌓아 별도를 설치하고, 금마저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국내 유일의 백제 왕궁터

미륵사지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인 왕궁면,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에도 발굴 작업이 한창인 곳이 있다. 바로, 1998년 9월에 사적 제408호로 지정되면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왕궁리유적지이다. 이곳은 1989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조사가 이어지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의 흔적과 건물터 등 왕궁의 윤곽들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한눈에 다 보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넓은 터다. 그 면적이 21만 8,155㎡에 이른다.

발굴조사결과 왕궁리유적지는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되었으며,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처음으로 우리나라 고대 왕국 왕궁의 외곽 담장과 건물지가 발견된 것으로,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정전건물지를 비롯한 14개의 백제 건물지, 정원유적,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대형화장실 유적 등이 발굴되었다. 이는 백제 시대 왕궁의 구조 및 생활상 조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더욱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수부(首府)명의 기와는 중앙정부가 있는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곳이 왕궁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 최고의 정원과 조경기술

왕궁리 유적지는 세계유산실사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곳이다. 계단식으로 된 후원인‘화계’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정원으로, 이는 6~7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유적이자, 동아시아권의 왕궁의 구조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자료라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왕궁리 유적지는 우리나라식의 정원 경관과 조경기술의 정수로 꼽히는 곳이다. 중국식과 일본식 정원의 혼합형으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구도를 갖추었고, 풍수지시설에 입각한 풍경식 정원이 발달한 것도 특징 중에 하나로 꼽을 수 있다.

# 왕궁리유적지의 의의

왕궁리유적지는 금마의 미륵사지(彌勒寺址)와 함께 최대 규모의 백제유적지로 과거 우리 민족의 정치·문화의 중심지로서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익산왕도설은 많은 문헌들이 익산이 한 국가의 왕도였음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설에만 의존한 신비로운 설화와 같은 이야기로만 여겨졌었다. 그러나 왕궁리 유적지의 발굴로 인해 이제 그 설화와 같은 이야기가 역사의 사실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익산이 문헌의 기록대로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역할을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의 가장 객관적인 증거자료이다.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아, 터의 규모로만 당시 왕궁의 위용을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왕궁리유적지 발굴조사에 더 큰 힘을 실어줄 것으로 기대를 하며, 백제시대 왕궁의 위엄을 실지로 느껴볼 수 있을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소통뉴스 정명열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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