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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都 익산 모습 '한 눈에 만나다'‥구석기부터 근대까지 '총망라'

국립전주박물관 특별전 <전북역사문물전12 익산> 첫 이야기...

등록일 2013년11월03일 15시37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국립익산박물관이 건립되면 어떤 유물이 전시되고 소개될까? 궁금하다면 국립전주박물관을 직접 찾아가보자. 
전북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전북의 역사문물전’ 열두 번째 ‘익산’ 특별전이 10월 29일부터 내년 2월 9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기존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유물을 비롯해 미륵사지유물전시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영남대학교박물관 등 전국 각지 익산 관련 유물과 전시품을 한자리서 만날 수 있다. 
구석기시대부터 근대까지 총 4부 가운데 1부와 2부를 먼저 소개한다.

민무늬토기 독널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품은 터전, 익산

익산은 고조선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이다. 백제 무왕이 새로운 백제 건설을 위해 새 왕궁과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을 바탕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곳 역시 익산이다. 또, 백제 부흥을 기치로 내건 견훤의 후백제 건설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던 곳도 익산이었다. 이러한 역사로 볼 때 익산은 한마디로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품은 터전’이라 할 수 있다.

마한의 중심
▲ 문화의 개화

익산 북쪽에는 금강이, 그 남쪽에는 만경강이 흐르고 있다. 강에서 뻗어나는 물줄기는 금마(金馬)와 왕궁(王宮) 일대까지 들어왔는데 이 물줄기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다른 곳으로 진출하기 위한 통로가 되었다. 익산은 ‘옥야(沃野)’로 불릴 만큼 비옥하고 너른 들이 펼쳐져 한 국가를 세우고 남을 만큼 풍요로웠다.

익산지역의 구석기문화와 신석기문화는 그동안 잘 알려진 청동기문화나 마한, 백제에 비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최근 발굴조사로 점점 그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구석기문화와 신선기문화가 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으로 볼 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큰 강과 작은 천이 발달한 익산은 구석기문화와 신석기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마한의 중심국가, 건마국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익산은 본래 마한국’이고 ‘후에 조선 왕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해 바다를 건너 남쪽 한의 땅에 다다라 개국하여 거듭 마한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익산은 고조선 왕이 남천한 곳이자, 마한의 중심이었다.

아울러 ‘후한서(後漢書)’ 한전(韓傳)에 따르면 ‘준왕 후손이 절멸하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곧 외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 준왕의 후손을 대신하여 토착 세력이었던 마한인들이 득세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익산지역에서 고조선 세력을 대체한 마한인이 세운 국가는 건마국(乾馬國)으로 추정된다.

건마국은 처음에는 고조선 준왕세력을 대신하여 마한연맹의 맹주를 자처하였으나, 점차 그 지위를 목지국(目支國)에 내줘야만 했다. 또한 백제가 성장함에 따라, 영산강 유역의 마한연맹체처럼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못하고, 점차 백제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수부명기와 ▲ 백제의 또 하나의 왕도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무왕)은 지모밀지(금마)로 천도하였다’고 전한다. 김정호 ‘대동지지’에도 ‘본래 백제의 금마지인데, 무강왕(무왕) 때 성을 쌓아 별도를 설치하고, 금마저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이었던 익산지역은 일찍부터 백제의 중요한 지방 거점 가운데 하나였지만, 명실상부하게 왕도(王都)로서 자리매김한 것은 무왕대(武王代)였다. 왕궁리에 조성된 궁성과 궁성 주변의 산성, 왕실사찰인 제석사(帝釋寺)의 창건, 그리고 새로운 신앙이자 통치이념인 ‘미륵신앙하생(彌勒下生信仰)’을 대내외에 과시하게 위해 창건한 미륵사를 보면, 무왕이 치밀한 계획 아래 익산을 백제의 또 하나의 왕도로 만들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익산 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된 백제 암키와 등면에는 ‘수부(首府)’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수부는 수도라는 의미로서 당시 최고 통치자인 왕이 거주하는 곳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수부명 인장와는 부여의 추정 왕궁터인 관북리유적과 익산 백제 왕궁터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왕궁리5층석탑 사리장엄구

1965년 12월 왕궁리5층석탑(국보 제289호)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발견된 지 16일 만에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이 사리장엄은 일반적인 탑과는 달리 1층탑신부와 기단부 두 곳에서 발견되었다. 1층 탑신부에 동서로 뚫린 2개의 사리공 중 동쪽에서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마개가 덮여 있는 녹색의 유리사리병과 금제사리함이, 서쪽에서는 금강경의 내용을 19장의 판에 새긴 금은제금강경판과 금동함이 발견되었다. 1층 탑신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외관상 우리나라 석탑의 사리장엄 내용상 큰 변화를 볼 수 있다. 유리사리병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라와 관련되고 금은제금강경판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불경으로 법신사리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구하기 어려웠던 국내에서는 왕궁리5층석탑에서 처음으로 진신사리에서 법신사리로 변화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는 금강경판의 미공개 되었던 면까지 공개하여 19매 전 편이 펼쳐진 형태로 전시 중이다.

2003년 3월 제석사 폐기장 시굴조사에서는 총 346점의 소조상(塑造像) 파편이 출토되었다. 천부상은 그중 하나로, 머리카락은 위로 모아 정수리에서 단순한 띠로 묶어 놓았으며 머릿결을 음양각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남아 있는 목 부분이나 안쪽의 골조방향 등으로 보아 고개를 약간 치켜든 모습인데 반듯한 코와 인중, 양끝이 살짝 올라간 살포시 다문 입술의 표현이 단아하다. 눈 부분은 균열이 갔지만 지그시 뜬 눈매와 살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도톰한 볼 부분이 어우러져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금강경판

미륵사(彌勒寺)는 백제의 무왕이 된 서동과 신라의 공주였던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로 잘 알려진 곳이다. 미륵사는 서원, 중원, 동원 등 세 개의 사원이 병립한 사찰인데, 이는 석가모니불 입멸 후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나 세 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의 서원을 사찰 평면에 구현한 것이다.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는 미륵불(彌勒佛) 하생한 시기에 전륜성황이 나라를 다스리며, 그 나라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통일제국이라고 전한다. 즉, 미륵사는 자기 스스로 전륜성왕이 되기를 바랐던 무왕이 삼한일통(三韓一統)과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시키겠다는 염원과 의지를 담아 창건한 사찰이다.

미륵사지금동풍탁은 백제시대 풍탁으로는 유일하게 원형대로 보전돼 조형적으로 매우 우수하면서 완벽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앞뒤로 새겨진 연꽃무늬와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양각무늬는 백제공예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에밀레종과 닮아있는 이 풍탁은 우리나라 범종의 시원(始原)양식으로 볼 수 있다. 백제나 신라 석탑의 옥개 모서리에는 흔히 풍탁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나 풍탁의 출토 예는 그리 많지 않다. 백제 지역에서는 부여 능산리에서 풍탁이 출토되었고 경주의 감은사지에서도 석탑에 달려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풍탁이 출토된 바 있다.

망새는 치미라고도 하는데 사찰이나 궁궐의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 놓이는 장식기와이다. 새의 꼬리 모양을 하고 있는데 하늘의 신과 지상의 인간을 연결하는 염원을 담고 있으며 재앙을 피하기 위한 의미가 있다. 이번에 전시된 망새는 백제 것으로 동원승방지에서 출토되어 복원되었는데 높이 99cm, 길이 85cm, 뒤 깃의 길이 53cm로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것보다 조금 크다.

천부얼굴

익산지역에 대한 백제의 직접 통치가 이루어진 4세기 이후 이 지역에는 마한 전통을 유지하려는 집단이 있었는가 하면, 백제의 귀족으로 편입된 집단도 있었다. 웅포리 고분과 입점리 고분의 굴식돌방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은 후자에 속한 집단으로 여겨진다. 특히, 금동관, 금동신발, 귀걸이, 중국제 청자 등이 출토된 입점리 고분 1호분의 주인공은 껴묻거리의 위용으로 보아 백제의 22담로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관모, 금동신발은 정교하면서 부드러운 이음새와 금동 위에 새겨 넣은 무늬들이 백제의 수준높은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 금동관모는 반원형 금동판을 좌우에서 붙이고 맞붙인 부분에는 복륜(覆輪)을 돌려 머리에 쓴 고깔모양인데 측판의 일부는 부식, 파손돼 있다. 금동신발은 2장의 금동측판을 잔못으로 앞뒤부분을 고정시키고 밑창판을 대어 만들었는데 밑창에는 9개의 스파이크가 박혀있다.

쌍릉(雙陵)은 이른바 대왕릉과 소왕릉 두 고분을 아울러 부르는 말인데, 무왕과 왕비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고분은 일찍이 1917년에 조사가 이루어져 7세기 전반의 특징을 보이는 굴식돌방무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무덤을 덮은 흙, 즉 봉토(封土)의 규모가 대왕릉의 경우 직경 30m, 높이 5m 달하는 등 부여 능산리 왕릉보다 그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쌍릉은 발견 때 이미 도굴된 상태여서 부장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대왕묘에서 목관과 옥제장신구 그리고 치아 3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목관재현품과 치아, 옥제장신구가 전시되고 있다.

소통뉴스 정명열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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