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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발견! 탑천에 얽힌 요교호(황등호)이야기

탑천따라 미륵사지 가는 자전거길 조성 '가을 정취' 곧 만끽

등록일 2011년08월23일 19시10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1937년 임익수리조합간척지평면도

익산 하나로 변전소 사거리부터 미륵초등학교까지 7km 이르는 '탑천 따라 미륵사지 가는 자전거길'이 조성 중에 있다.

8월 말이면 탑천을 따라 편리하게 자전거를 타고 미륵사지까지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을 전망이다.

이 탑천 자전거길 주변에는 아담한 시골마을들이 있다. 임상, 석왕, 은기, 신기, 중앙, 하왕, 석교, 서편, 노상 등이다.

이 마을 유래를 조사하는 가운데 임상동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권세호 어르신(임상동 임내, 7)을 만났다. 그는 고령임에도 지나온 역사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잘 설명해 주었다.

특히, 어르신이 소장하고 있는 뜻밖의 지도를 만났다. 1937년 임익수리조합에서 발간한 임익수리조합간척지평면도(臨益水利組合干拓地平面圖)이다. 이는 요교호 물을 빼고 경지정리를 해서 일본인들이 땅을 팔기 위해 만든 지도이다.

일제시대 식량수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요교호(腰橋湖). 요교호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 가운데 한 곳이었다고 한다. 요교호 가운데 요교(腰橋, 허리다리, 현재의 국도 23호선 황등가는 길)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외화, 내화, 월성, 임상, 정족, 몽환마을이 있는 삼성동 일대는 모두 습지였다. 1910년 일본사람이 독수문(현재 독수문가든)부터 황등 남성다리(황등 청남산)까지 1.3km길이의 둑을 쌓아 물을 가두고 습지였던 요교 아래쪽 익산, 임피 땅을 비옥한 간척지로 만들어 쌀을 수탈했다.

그래서 그동안 걸어 다니던 길을 1910년부터 임상동에서 황등까지 가려면 배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지금의 황등 도선마을이 선착장 자리였다. 지금의 탑천 상류지역은 작은 지천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요교호 근처 탑천은 요교호 물이 많을 때는 잠겨있던 곳이다.

그러다가 원래 습지였던 요교호를 경작지로 만들기로 하였다. 1937년 간척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습지는 논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대해 권세호 어르신은삼성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즈음 극심한 가난에 지칠 대로 지쳤던 주민들에게 대단히 기쁜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 고장에 침수 피해와 교통의 불편을 안겨줬던 요교호의 넓디넓은 저수지물은 만28년 지난 1935년 가을 서서히 빼기 시작했고 1935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간척공사를 시작했다. 황등에 갈 때 이용하던 뱃길은 큰 신작로가 되었고 하천은 깊은 공사로 물이 빠지니 넓은 호수가 경지 정리되어 바둑판같은 필지답 1,200평씩 분할을 1년 만에 완공하여 1937년부터 영농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도로가 없어 교통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황등 팔봉길이 개통된 후 넓은 신작로에 우마차가 농산물을 유유히 운반하게 되었으니 벽해가 상전이 된 격이었다."

일제는 1935년 완주군 화산면 경천저수지를 만들어 하류지역에 쌀농사를 짓게 해 쌀 수탈 면적을 늘린 것이다. 그 당시 경천저수지 수몰민들 가운데 이주 희망자는 경작하던 영농면적을 감안하여 요교호 간척지 농지를 배정하고 초가삼간을 신축하여 정착시켰다.

수백, 수십 년 전부터 이어온 마을 이름을 그렇게 부르게 된 데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지역의 역사를 알고 있는 어르신들은 보물이다. 탑천 자전거길을 조성하고 있는 익산시청 도시개발과 이인성 실무관과 함께 문헌자료를 조사하고 마을 어르신들을 직접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정리한 마을의 유래이다.

1937년 임익수리조합간척지평면도

♠탑천 자전거길 주변 마을이야기

임상동(林相洞)

임상(林相)은 임내(林內)를 중심으로 인근 신림, 후리, 진자, 반월 등 마을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이 지역의 높은 구릉지는 대부분 소나무, 참나무 등이 울창하고 저지대는 습지로 갈대숲이 장관을 이룬다, 더 깊은 습지에는 수초가 군락을 이루어 쓸모없이 버려진 땅이었다.

고려말엽 유명한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양촌 권근(陽村 權近) 선생이 임상동 몽환마을 양촌대로 유배될 정도 한적하고 외진 곳이었다.

과거 이곳에 지석묘(支石墓) 즉 고인돌 유적지가 있어 조선시대에는 지석면이라 불렸다. 그 위치는 몽환마을 동편 200여 미터 지점이다. 돌팍재라고도 부르는 이 재는 오상마을에서 몽환마을과 삼성초등학교가 있는 반월마을로 통하는 야트막한 고개이다.

석왕동(石旺洞)

신왕리(新旺里), 상왕리(上旺里), 하왕리(下旺里), 석치리(石峙里)등을 병합하여 석치와 상왕의 이름을 따서 석왕리라 하였고 1983년 이리시에 편입될 때 법정동으로 ‘석왕동’이라 하였다.

상왕(上旺)은 ‘왕묘’ 또는 ‘왱메’로도 불리었다. 대왕묘 소왕묘라 불리우는 쌍릉은 백제 무왕릉과 왕비인 선화공주의 릉이다. 상왕이란 무왕릉에 해당하는 대왕묘와 연관 지워 붙인 이름이다.

신왕(新旺)은 상왕(上旺)과 하왕(下旺) 옆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석치(石峙)는 ‘돌고개’의 한문자 표기이고 팔봉동 당산 마을에서 돌고개로 넘어가는 고개가 돌로 되어 있어 생긴 이름이다.

은원(隱院)

은원은 깊숙이 숨겨져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은원은 은천이라고도 하는데 산 밑에서 맑고 시원한 샘물이 솟는다 해서 은원의 샘이 은천이 되었다.

신기(新基, 새터)

신기마을은 새로이 형성된 마을을 뜻한다. 그러나 이 마을은 500여년이 된 장흥오씨 집성촌이다. 풍수지리상으로 뒤에는 등매산이 있고 앞에는 망동천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속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전면에 보이는 덕천서원은 임진왜란 시 의병으로 참전하여 금상성 싸움에서 순국한 오응현, 오응필 형제를 추모하기 위하여 이 고장 유림들과 자손들이 성균관의 승인을 받아 건립한 서원이다.

후에 광주에서 거병한 의병장 고경명과 오응현, 오응필 형제, 그리고 아우인 오응철 4분을 추배하여 4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봄에 익산향교의 주관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특히, 오응현, 오응필 형제는 선무원종 2등 공신으로 호남절의록에 기록돼 있다.

석교(石橋)

석교(石橋)는 마을 위로 금마와 황등 간의 큰 길이 있고 망동천(望洞川)을 건너는 돌다리가 있어 불린 명칭이다. 이 돌다리는 뒤에 내두(內豆)와 석치(石峙) 마을 중간의 망동천 다리로 옮겨졌다.

거리다리의 거리는 좀 큰 길을 뜻하던 말이다. 거리다리도 금마 황등 간의 큰 거리에 놓은 다리기에 그렇게 불리었다. 거리다리를 전에는 건너다리, 건넛다리 라고도 했다. 이같이 부르게 된 것은 석교(石橋)외에도 다리가 있어서 구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서편(西邊)

서편(西邊)은 미륵사를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쓰기는 서변(西邊)이라고 쓰고 읽기는 서편이라 발음한다. 버들골은 버들이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

노상(路上)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앞에 마을이지만 미륵사지 발굴 이전에는 현 미륵사지 서북편 우물 부근에 있던 마을이었다. 노상이란 지명은 금마와 황등 간의 큰 길 위의 마을이므로 길 갓마을 또는 길 윗마을이 한자화하여 된 명칭이다. 현재 노상마을은 1970년대 말 미륵사지의 개발과 함께 문화재관리법에 의해 강제 이주되었으며 현재는 관광촌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

미륵초등학교(http://www.mirk.es.kr)

영화 내마음의 풍금 속에 나올 법한 작은 시골 초등학교인 미륵초등학교

1947년 개교하여 2011년 현재까지 제61회 2,75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현재 유치원생을 포함 총 학생수는 60여명 정도이다. 사교육이 없는 작고 아름다운 학교를 표방하여 교과외 영어, 수영, 컴퓨터와 방과후 다양한 특기적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 자료제공 : 희망연대 임형택 ☎ 841-7942

소통뉴스 정명열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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