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난 19일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에서 이 탑이 1400년 전 백제시대 왕실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된 금제사리봉안기를 발굴, 그동안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정되어왔던 백제의 익산 천도설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천년고도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날 공개된 백제유물은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가 담겨있는 사리장엄(舍利莊嚴) 등 500여점에 달했고,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년)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금제사리봉안기가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앞면 99자, 뒷면 94글자를 새긴 전문은 그동안 밝혀진 문헌 중 가장 많은 글자를 가진 193자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 1400년 전 문헌으로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며, 삼국유사에만 기록되어 한 낱 설화 취급을 받아왔던 미륵사 창건 주체와 시기가 역사적 사실로 재인식 됐다는 측면에서 백제문화연구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는 평가다.
익산의 대표 향토 사학자인 전원광대학교총장이자 전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김삼룡 박사는, “이번 사리장엄의 발견으로 인해 639년에 왕후가 미륵사를 지었다는 명백한 사실이 증명되어,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무왕의 통치 사실을 입증하는 익산 왕궁터를 부정해 온 학자들의 주장이 종식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김 박사는 또, “우리 역사의 모서는 백제 멸망 후 고려 중기인 1281년 경에 쓰여진 삼국사기이고, 여기에는 백제 왕궁의 익산 천도설이나 미륵사 창건 사실은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이번에 639년의 기록이 발견되면서 고려 후기 일연에 의해 쓰여진 삼국유사 역시 역사적 문헌이라는 점이 입증되었다는 게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고 부연했다.
김 박사는 이와 함께, “이번에 발견된 금제사리호와 사리봉안기 등 중요유물 500여점은 보존처리된 후 향후 출토지인 익산 미륵사지에 위치한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 전시를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승격시켜야 되고, 찬란했던 백제 왕궁의 도시를 되찾아 줘야 한다”고 촉구했다.